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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 [사람과 이야기] 오토바이로 수천㎞ 누빈 '호찌민 여장부'

비나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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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뉴비엣한FRP社 박건이 부사장
배 팔 대리점 구하려 할 땐 현지인이 대접한 쥐까지 먹어
日 시장 두드렸다 핀잔 듣자 서적 탐독하며 전문가 돼… 신용만으로 日 무담보대출도

 

 

인구 1200만명의 베트남 남부 최대 도시 호찌민에서 북쪽으로 100㎞쯤 떨어진 민흥(Min Hung)공업단지에 '뉴비엣한(New Viet Han)FRP'라는 회사 공장이 있다. 뉴비엣한은 '새로운 베트남·한국'이라는 뜻이다. 이 회사는 강화플라스틱(FRP)으로 가정용 정화조와 풍력발전기 부품, 자동차용 범퍼 등을 만들어 전량 일본에 수출하는 중소기업이다.

 

지난 6일 이곳에서 박건이(朴建伊·33) 부사장을 만났다. 가냘픈 몸매였지만 그의 별명은 '호찌민의 여장부'다. 그와 9년째 단짝인 베트남 여성 후에(Hue·33)씨는 "박 부사장은 무서운 여자"라고 했다. 후에씨는 2003년쯤 둘이 FRP로 만든 배를 팔 대리점을 구하려고 호찌민에서 남쪽으로 300㎞쯤 떨어진 메콩강변의 '땀농' 마을에 갔을 때의 경험담을 털어놨다. "마을 사람들이 작은 토끼만한 식용 쥐인 '팃쪽'을 구워 대접했고 저는 한 입 떼먹고 토했는데, 박 부사장은 꾹 참고 쥐 한 마리를 다 먹더니 결국 대리점 계약을 따내더라고요." 박씨는 웃으며 "현지인들에게 신뢰를 주려면 쥐든 뭐든 먹을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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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6일 베트남 민흥공업단지 내 생산공장에서 박건이 부사장이 현지 직원들에게 작업 요령을 설명하고 있다.

 

 

부산 토박이인 박씨는 2001년 2월 동아대 일어일문과를 졸업했다. 2002년 5월 작은 무역회사의 베트남 지사에 발령받았다. 그러나 한국에서 소형 카메라와 중고 컴퓨터를 가져다 베트남에 팔던 사업은 중국 기업들의 저가(低價) 공세에 밀려 그해 말 파산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제조업으로 전환해 만든 회사가 지금의 뉴비엣한FRP다. 그 후 그녀는 세 번 울었다. 메콩강 지류에 사는 수백만 주민들이 주로 목선을 이용해 생활하는 것에 착안해 호찌민 남쪽 동탑 시(市)에 공장을 세우고 FRP 배를 만들었다. 오토바이로 수천㎞를 누비고 다니면서 쥐까지 먹어가며 대리점 16개를 확보해 2004년 3월 판매에 나섰다. 그러나 베트남 경쟁 회사들이 배를 반값에 내놓는 바람에 투자금까지 다 까먹고 망할 지경이 됐다. 2004년 말까지 월급 한 번 받지 못한 그는 "월급도 못 주는 회사에 계속 다닐 필요가 있나"하는 생각에 베트남을 떠나려 했다. 호찌민 공항에서 한국행 비행기를 기다릴 때 박씨 얼굴은 눈물범벅이 됐다. 하지만 그녀는 곧 베트남으로 돌아갔다. 동탑 시에서 '한국인 1호 거주증'을 받은 그가 '한국인 1호 실패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박씨는 오히려 회사에 자금을 보탰다.

 

박씨는 가정용 정화조와 자동차용 범퍼 같은 상품을 만들어 일본 시장을 두드렸다. 일본 회사 간부로부터 "그 정도 얕은 지식으로 FRP를 만들었단 말이냐"는 핀잔을 들었을 때 눈물이 쏟아졌다. 일본 기술서적을 읽고 공장 한쪽에서 실험을 하면서 FRP 전문가가 됐고, 일본 회사에 납품할 수 있었다.

 

이 번엔 공장 부지를 빌려줬던 베트남 회사가 망해 이사해야 했다. 2008년 3월 직원 200명이 탄 버스 4대와 자재를 실은 11t 트럭 30대가 동탑을 떠나 민흥공단으로 이사 가던 날, 길 위에서 회사가 들어갈 민흥공단 건물 2개가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또 울었다. 그래도 그녀는 인근의 부도난 빈 공장에서 생산을 계속하다 작년 봄 지금 자리에 터를 잡았고, 지난해 500만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사장 박모(53)씨는 그녀를 복덩이라고 했다. 민흥 공장도 그녀가 신용 하나만으로 일본은행에서 무담보로 150만달러를 유치해 지었다고 했다. 당시 베트남 자금은 연리 22%를 넘나들었지만, 그녀는 연리 4%에 자금을 끌어왔다.

 

"월급요? 대기업에 취업한 친구들만큼은 받아요. 하지만 회사 지분을 갖고 있어 이익배당을 받으면 월급보다 훨씬 많아요."

 

그는 베트남 생활에서 "인생에 절대로 대박은 없다"는 교훈을 얻었다고 했다. 특히 제조업은 뿌린 만큼 거두기도 어려운 세계이고, 매년 조금씩 좋아지는 것이지 하루아침에 대박을 터뜨릴 수는 없다는 얘기다.

 

"결혼은 베트남에서 평생 같이 살 한국 남자랑 하고 싶어요." 그는 베트남과 베트남 사람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절대로 베트남을 떠날 수 없다고 했다.

 

 

조선닷컴 : 2011.01.15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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