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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9월 3일 - 베트남 혁명가 호치민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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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오늘, 베트남의 혁명가 호치민이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납니다.

 

 

북베트남과 전쟁 중이던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도 그가 타계하자 “민족 지도자 가운데에 그만큼 꿋꿋하게 오랫동안 적의 총구 앞에서 버텼던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헌사를 바쳤습니다. 심지어는 남베트남 대부분의 시민들도 검은 리본을 달고 그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1890년 반프랑스 저항운동의 핵심지역인 ‘응에안 성 킴리엔’ 마을에서 태어난 구엔신쿵(응우옌신쿵·호치민의 어릴 때 이름, 그는 70개가 넘는 가명을 사용했습니다)은 프랑스식 국립학교에 재학 중이던 18살 때 조세 반대 시위에 가담해 퇴학당함으로써 기나긴 항쟁의 삶을 시작했죠.

 

프랑스어로 ‘자유’, ‘평등’, ‘우애’란 말을 듣고 가슴이 설렌 청년은 “그 말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여객선 주방 보조로 일하며 프랑스로 건너간 그는 1911년부터 2년 동안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등 세계 곳곳을 여행합니다.

 

“나는 대학에서 공부를 하는 행운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삶은 나에게 역사, 사회과학, 심지어 군사과학을 공부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무엇을 사랑할 것인가? 무엇을 경멸할 것인가? 우리 베트남인에겐 독립, 노동, 조국애가 필요합니다.”

 

1차 대전이 끝날 즈음 구엔아이쿠옥, ‘나라사랑’이란 이름으로 불린 호는 프랑스에서 ‘베트남애국자연합’이란 조직을 결성하고, 연합국 지도자들에게 ‘베트남 민족의 요구’라는 독립청원서를 제출하죠. 이때부터 프랑스 식민당국의 감시를 받기 시작한 호는 점점 깊이 사회주의 사상에 빠져들게 됩니다.

 

25년 베트남혁명청년회 결성, 30년 베트남공산당 창당을 거쳐 40년 베트남독립동맹(베트민)의 결성으로 독립운동에 전기를 마련한 호치민은 45년 9월 베트남민주공화국 선포에 이르지만 식민지 종주국으로 복귀한 프랑스가 영국·중국과 거래 끝에 베트남 전역에 지배권을 장악하게 되자 그는 대프랑스 항전을 시작합니다.

 

프랑스와의 전쟁은 1954년 그의 동지인 보구엔지압 장군이 이끈 디엔비엔푸 전투의 승리로 일단락되었으나 이어 체결된 제네바평화협정으로 베트남은 북위17도선을 경계로 하여 남북으로 분단되고 말았죠. 냉전체제 아래서 미국이 프랑스를 대신해 베트남에 들어왔고 60년대 내내 미군과의 ‘정글속의 지루한 전쟁’이 계속되었습니다.

 

호치민은 평생을 독신으로 살며 그 소탈한 성격과 청렴한 생활로 베트남의 모든 민중들로부터 ‘호 아저씨’라 불리며 존경을 받았습니다. 주월 한국군 사령관을 지냈던 채명신 장군의 회고록에도 사령부의 베트남 여성 타이피스트들에게 제일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서슴없이 ‘호치민’이라고 대답해서 놀랐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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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사상을 요약하면 ‘3꿍 정신’으로 요약됩니다. ‘꿍아’(함께 산다), ‘꿍안’(함께 먹는다), ‘꿍담’(함께 일한다)이 바로 그것이죠. 그는 국민과 동고동락하는 지도자의 모습을 전 생애를 통해 보여주었습니다. 색 바랜 노동복에 왜소한 체구, 마른 발엔 언제나 낡은 타이어를 잘라 만든 샌들을 신고 있었던 이 남루한 행색의 지도자 앞에서 베트남인들은 언제나 마음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의 마음을 가졌던 것이죠.

 

베트남 민족주의는 역사상 숱한 가시밭길을 헤쳐 온 베트남 민족 특유의 굴하지 않는 강인한 정신의 발로이지만 ‘민족의 스승’으로 칭송받아온 호치민의 사상과 지도력이 더해져 더욱 기름진 통일의 밑거름이 됐음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베트남전에서 첨단무기를 자랑했던 미군에 비해 초라한 호치민 군대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유형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무형전력이 우세했기 때문입니다.

 

아쉽게도 그는 평생을 꿈꾸던 베트남의 통일을 못보고 눈을 감습니다. 그는 평소 읽었던 많은 책 이외에 두 벌의 옷, 몇 벌의 속옷, 기워 신은 양말, 폐타이어를 잘라 만든 신발, 낡은 모자 등을 남겼고, 자신을 화장해서 재를 북·중·남부에 한줌씩 뿌려달라고 당부했습니다. 하지만 베트남 국민은 그의 주검을 오래오래 보존하기 위해 하노이 한복판 바딘광장에 안치하였고, 지금도 그의 묘소에는 참배객의 추모 행렬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 블로그] 곰PD의 전쟁이야기 : 2009/09/03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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