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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호치민은 베트남 독립 위해 부엌일부터 했다?

비나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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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독립의 아버지 호치민(胡志明·1890~1969)은 1911년 6월 프랑스 기선 아미랄 라투셰-트레빌 호의 주방 보조로 고용되어 유럽으로 건너갔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지배국 프랑스로 유학을 가던 청년은 배 안에서 수시로 펼쳐지는 프랑스 식탁문화를 접하면서 후일 세계 최강대국 프랑스, 미국과 대항해 이길 상승무공의 알고리즘을 만들어 나갔을 것이다.

 

그리스의 선박왕 오나시스(1906~1975)는 젊은 시절 꽤나 가난했다고 한다. 그는 하루하루 벌어 끼니를 굶어 가면서도 돈을 모았는데, 어느 정도 돈이 모이자 부자들만 다니는 고급식당으로 갔다. 그렇지만 행색과 신분이 너무 초라해서 여러 차례 출입을 거부당한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부자가 오나시스에게 “자네는 왜 힘들게 번 돈을 한 끼 식사에 다 바치려 하는가?”고 물었다.

 

“저는 당신들의 생활이 부럽습니다. 그래서 당신들의 생활 방식과 문화를 배우고 싶습니다.”

 

“정히 그렇다면 어디 한번 우리들의 방식을 배워보게.”

 

그리하여 식탁매너에서부터 상류층 문화를 배워 나가 그들과 친구가 된 오나시스는 그들에게서 일감을 받아내어 결국에는 세계적 부호가 되었다.

 

신년이나 생일, 또는 이벤트성으로 임직원들과 함께하는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식사가 요즘 자주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다. 한 식구임을 확인하고 그동안의 노고에 대한 답례 겸 격려 차원으로 베푼 자리일 것이다. 직접 가보질 못해 과연 한국 최고 재벌 그룹의 식사품격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그 결과가 괜찮았던 모양으로 회장님과의 식사파티가 앞으로도 자주 열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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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크 쥐는 법을 배우고 '인간'이 된 헬렌 켈러(사진 왼쪽)와 호치민. 조국의 독립을 위해 지배국 프랑스로 유학가는 배안에서 프랑스 식탁문화를 파악한 호치민. 인터넷 화면 캡처

  

 

사람을 동물과 구별짓기

 

오래전에 한국을 다녀간 적이 있는 헬렌 켈러(1880~1968)에 관한 이야기는 여러 책과 영화를 통해 널리 알려져 있다. 말하고 보고 듣는 것에 장애를 지닌 어린 헬렌 켈러에게 어느 날 설리번이란 가정교사가 온다. 그녀 역시 심한 시각 장애를 극복한 경험이 있어 헬렌의 선생으로 위촉받고 온 것이다.

 

처음 그녀가 한 일은 헬렌의 엄마에게서 사흘 동안 헬렌과 자기만 따로 격리해서 생활할 수 있게 해준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것이었다. 그동안 어떤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중간에 부모가 간섭하지 않기로 하고 집 뒤 오두막에서 둘만의 생활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맨 먼저 그녀가 헬렌에게 가르친 것은 식탁매너였다. 중증 겹장애를 지닌 헬렌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가 하면 여차차면 식기를 집어던지는 등 거의 동물에 가까울 정도로 참혹한 상태였다.

 

먼저 포크 잡는 법을 가르치는 데 제대로 될 턱이 없다. 미치광이처럼 반항하는 헬렌을 설리번은 단호하게 원시적으로 다룬다. 무자비한 폭력이 가해지고 보다 못한 엄마가 그만두기를 눈물로 빌었지만 설리번은 처음의 약속대로 강력하게 밀고 나가 결국 포크를 잡게 만든다. 다음으로 냅킨을 펴고 접는 법을 가르쳐 식사의 시작과 끝을 알게 한다. 이렇게 하여 온전한 사회적 인격체가 갖추어야 할 테이블 매너를 하나씩 가르쳐 나갔다.

 

사흘간의 격리 생활이 끝난 후 온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되는데, 그 자리에서 엄마는 “우리 헬렌이 이제 사람이 되었구나!”며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 한국인들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이 부분을 그냥 흘려듣거나 읽으면서 지나쳐 버리지만, 헬렌에게는 인간 정체성 회복의 의미를 부여하는 중대한 말이다.

 

드디어 헬렌이 정상적인 가족 공동체 일원으로서, 성숙된 인격체로서의 위상을 가졌음을 선언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헬렌의 엄마가 법적친권자로서 선포하는 법률행위에 해당한다. 이 대목은 인도에서 리메이크 제작된 동종 영화 ‘블랙(Black·2005)’에서도 누락 없이 재연된다.

 

법적으로 완전한 사람임을 선포하는 이 행위는 증인, 즉 그 자리에 설리번 선생이 있음으로써 효력을 지니게 된다. 이는 헬렌의 장래를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행위이다. 왜냐하면 금치산자, 한정치산자, 완전장애인은 부모 사후에 유산을 상속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 재산은 동생에게로 가게 되어 있다. 설리번이 맨 처음 한 일은 바로 헬렌을 법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일이었다.

 

 

왜 식탁매너인가?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기 시작한 것은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하지만 그 사회성은 식사법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인간만이 동물들과 달리 식사 때 가족 공동체가 골고루 음식을 나눠먹는다. 그리고 그 요리법과 식사매너는 장례나 결혼과 같은 의례 행위로서 각 민족마다 제각기 다른 독특한 형태를 지닌다. 결국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 것은 이 식사문화라고 해도 과히 틀리지 않는다.

 

또 우리는 가족을 ‘식구(食口)’라는 말로 대신한다. 이 단어는 굳이 혈연관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한솥밥을 먹는 모두를 말한다. 그처럼 식사행위는 문화인류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연구재료가 된다. 인간관계의 핵심을 이루는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당연시하는 일상생활이어서 그 의미에 대해 주의 깊게 생각하지 않을 따름이다. 우리말에 죽었다는 표현을 ‘숟가락 놓았다’고도 하듯 식사의 시작과 끝은 곧 '사람', 즉 '삶'의 시작과 끝이라는 엄중한 의미를 지닌다.

 

인류학적으로 보면 식사시간은 가부장의 권위를 확인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모든 가족이 둘러앉아 함께 식사를 나누는 자리는 서열화되어 있어 안쪽 상석에는 가장이 위치해 그 권위를 확인시킨다. 즉 이처럼 편안하게 식사를 할 수 있는 공간(집)을 마련하고, 먹거리를 마련한 사람이 바로 아버지임을 주지시키는 것이다. 당연히 가족들은 가장에게 고마워해야 하며, 그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숟가락 뺏기고 쫓겨난다.

 

하여 밥상머리는 가장인 남편이 자신의 결정적 의사를 가족들에게 전달하고, 부인과 그 자식들은 복종하되 가장더러 더 많은 돈을 벌어오라고 바가지를 긁거나 보챌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가정 내의 실질적인 문제를 의논하는 것도 대부분 이 식사자리에서다. 반면에 가족간의 사안이 아닌 남의 이야기나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담론은 대개 식후 차를 마시는 시간을 이용하게 된다.

 

 

가족성 회복하려면 한 끼 식사부터

 

일찍이 상업의 발달로 도시문화가 발달한 고대 중국이나 근대 서양에선 외식문화가 발달했지만 농업 위주의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식사는 거의 가정에서 이뤄졌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도시 직장인이라 해도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했지 매식은 많지 않았다. 그러다가 80년대 이후 서비스업이 비약적으로 발달하면서 외식하는 일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반면에 온 가족이 한자리에서 식사할 수 있는 기회는 점점 줄어들었다. 당연히 가족간의 사회성과 위계질서가 느슨해지거나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식사뿐 아니라 다른 일상에서도 가족이 모두 함께하여 그 가족성을 확인하는 기회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저녁을 먹고 나면 온 가족이 텔레비전 앞에 모였었지만, 이젠 그런 풍경도 찾기 어렵다. 스마트폰이 생기면서 텔레비전도 각자가 자기 방 침대에 드러누워 즐기는 시대가 되었다. 가족간의 대화를 방해한다며 구박받던 바보상자였지만 그나마 가족을 한자리에 모으기라도 하던 그 사회적 기능을 상실해 버린 것이다.

 

대부분 가족성이 좋은 집안은 반드시 아침 한 끼 정도는 온 가족이 함께 나누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반면에 가장이 경제적 구실을 제대로 못하거나, 가족들 각자가 바쁘다는 핑계로 집에서나 밖에서나 따로따로 식사를 해결하는 사람들의 가정은 그다지 화목하지를 못하다. 그러니 건강한 가족성을 유지하고 싶다면 먼저 가정에서의 엄격한 공동식사부터 챙겨야 할 것이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은 식탁에서 시작

 

지난날 엄격하고 기품이 있었던 우리의 전통 식사예절이 산업화 도시화 서구화와 더불어 변질되거나 사라져 버렸다. 대신 도무지 격조라곤 찾을 수 없는 막무가내 배불리 먹고 보자는 식의 상스러운 식탁문화가 자리잡았다. 세계화되면서 한국에도 와인문화가 급속히 퍼져나가고 있지만 국가 최고위층은 물론 재벌 등 상류층의 식사매너조차 글로벌 기준으로 보면 아직 무수리 같은 하녀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국가의 품격을 갖추는 데 어려움이 많다. 비싼 포도주 마신다고 품격 올라가는 것 아니다.

 

동서양을 불문하고 문명국가에서는 식사를 단순히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한 자리로만 인식하지 않는다. 이대로라면 드라마나 영화에서 온 가족이 함께 식사하는 장면이 나오면 저도 모르게 한숨 쉬는 한국인들 점점 늘어갈 것이다. 글로벌 세계에서 식탁매너가 왜 그토록 중요한지는 잎으로 차근차근 짚어나가기로 하고, 우선 가정에서 품격을 지닌 식사의례를 재구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겠다. 그런 의미에서 기업 오너(가장)으로서의 권위와 책임을 확인시키는 회장님과의 '품격 있는 식사’의례는 매우 바람직한 일로 보인다.

 

 

 

 

글/신성대 도서출판 동문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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